classical music

빨강머리 사제 안토니오 비발디

쉰김치 2020. 11. 2. 02:32

 

비발디는 이탈리아 베네치아에서 상 마르코 극장의 바이올리니스트였던 지오반니 바티스타 비발디의 장남으로 태어났다. 그에게 처음 바이올린을 가르쳐준 사람은 다름아닌 아버지였다.

15세때 삭발하고 하급성직자가 된 그는 25세때 서품을 받아 사제의 길로 들어섰다. 같은 해 9월 그는 베네치아 오스페달로 델라 피에타 여자양육원의 바이올린 교사로 취임했다.

피에타 양육원은 여자 고아들만 모아 보육하는 일종의 고아원으로서 특히 음악교육에 중점을 두었다. 비발디는 실기 지도는 물론이고 원생들로 구성된 피에타 관현악단의 지휘를 맡아 했으며 그들을 위해 여러 곡을 작곡하기도 했다. 그의 음악이 대체로 아름답기는 하나 다소 나약하다는 평을 받기도 하는 이유는 주로 여자아이들을 위해 쓴 곡이 많기 때문이라는 설도 있다.

한편 그는 미사곡, 모테토, 오라토리오 등 교회를 위한 종교음악도 다수 썼다. 또한 오페라에도 손을 대는 등 허약한 체질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초인적인 힘으로 창작활동을 해나갔다. 그의 속필은 특히 유명해, 전문 사보가들의 사보 속도보다도 더 빨리 풀 스코어를 써 제끼곤 했다고 한다.

그의 작품은 현을 위한 협주곡만도 400곡을 넘을 정도로 방대한 양이었다. 그러다 보니 작품마다 특색이 별로 없다는 흠을 남기기도 했으나 뒷날 비인 고전파의 모차르트, 베토벤 등에 의해 확립된 독주협주곡의 선구자 역할을 훌륭히 해냈다는 공로를 잊어서는 안된다.

가수 안나 지로와의 염문 1723년, 즉 나이 45세 무렵부터 비발디는 알토 가수 안나 지로와의 관계가 범상치 않게 깊어졌다. 지로는 프랑스에서 이민 온 가발제조공의 딸로 비발디에게 성악을 배운 제자였다. 비발디가 노래 실력도 대단치 않은 그녀를 자기 오페라에 자주 등장시켰으므로 두 사람의 관계는 세인들의 입에 오르내리지 않을 수 없었다. 게다가 안나의 동생 파올리나가 비발디의 가정부로 일하면서 그들 자매와 비발디는 아예 한집에서 살기 시작했다. 그들의 공동생활은 더욱 흥미있는 가십거리로 꼬리에 꼬리를 물고 퍼졌고, 마침내 교회에서 들고 일어나 그의 오페라 상연을 금지시키는 한편 고아원을 위한 음악까지도 다른 작곡가에게 넘기도록 엄명을 내렸다. 안나를 비발디의 정부로 단정한 사람들은 연일 아우성을 쳤다.


"명색이 사제라는 자가 불륜의 관계를 맺다니, 도저히 용납할 수 없는 일이다! 당장 이 도시에서 쫓아내라! " 견디다 못한 비발디는 결국 안나를 데리고 오스트리아의 비인으로 도망쳤다. 그러나 그들의 스캔들은 이미 그곳에까지 퍼져 있었다. 한 친구가 그를 보고 빈정거렸다. "어설픈 사랑을 하다 고향에서 쫓겨났다면서?" 자만심 강하고 자기 자랑하기 좋아하는 비발디가 그런 비웃음을 순순히 받아넘길 리 없었다. 그는 콧방귀를 뀌며 큰 소리로 말했다. "쫓겨나다니? 난 단지 사랑과 베네치아를 맞바꾸었을 따름이라구!"

 

 

https://youtu.be/vjaQAUrfoZ0

"비발디는 바이올린 주자로서는 만점, 작곡가로서는 그저 그런 편이고, 사제로서는 영점이다." 골도니는 원래 법률을 공부하다 희곡을 쓰는 일로 전향한 사람이었다. 비발디는 다음과 같은 골도니에 대한 평으로 응수했다. "골도니는 험담가로서는 만점, 극작가로서는 그저 그런 편이고, 법률가로서는 영점이다."